[KNS뉴스통신=김재덕 기자] 53만 고려인, 청소년 모국체험 평화포럼 구홍서 좌장은 뷰티코리아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한국 뷰티산업을 리더하는 멘토로서 35년간 화장품 유통경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약 40여개국에 진성파트너들이 포진되어 있는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나 한민족 고려인을 통하여 러시아를 포함 주변 중앙아시아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해왔다.
53만 고려인 청소년 모국체험 김재덕 집행위원장(장애인문화신문 발행인)은 문경시에서 진행하는 8월 15일 봉사활동과 지역탐방을 시작으로 8월 16일 '경제는 평화다' 평화포럼 구홍서 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Q. 김재덕 위원장. 53만 고려인은 그 동안 철의 장막에 가려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 그들의 생활상이 알려지지 않았다.
A. 구홍서 좌장. 53만 모국 고려인은 조국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 아니다. 조선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견디다 못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던 이주민들의 후예이며 잃어버린 조국의 광복을 찾고자 독립투쟁을 벌이던 망명한 지사들의 후예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철의 장막이 가리면서 이들은 사상과 거주 선택의 자유를 잃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Q.김재덕 위원장. 스탈린은 1937년 소수민족 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의 20만 한인들을 두 달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황폐한 땅으로 내팽개쳐버렸다.
A.구홍서 좌장. 그것은 한인들의 조직적인 반발을 우려해 사전에 약 3000여 명의 한인 지도자급들을 일제의 간첩, 혹은 트로츠키주의자란 누명을 씌워 처형시켰고, 불시에 일반인들의 집을 습격해 역으로 끌고나갔다. 한인들은 행선지도 모른 채, 화물차 짐칸에 짐승처럼 실려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물설고 낯선 중앙아시아 한 겨울 들판으로 내몰렸다.
Q. 김재덕 위원장. 그렇다면 한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하다.
A. 구홍서 좌장. 내몰린 한인들은 들판에서 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당장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땅굴을 파며 밤을 새우곤 했다. 그 매섭고 혹독한 겨울이 지나는 동안 기아와 병마에 시달려 유아와 노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후 60여 년이 흐르도록 철의 장막에 가려 조국과는 완전 연락이 끊어진 상태로 살아왔는데, 이제 문호가 개방된 현재에도 우리는 이들에게 동족애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내밀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강제 이주 이후에도 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며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을 당했고 사회적․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차단당하고 말았다.
Q. 김재덕 위원장.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일어 났는가.
A. 구홍서 좌장.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모든 제약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한인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벼농사를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나갔다.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놓아도 풀이 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과 부지런한 정신을 바탕으로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Q. 김재덕 위원장. 강제이주 83년, 무국적으로 고통받는 고려인에 대한 오랜 세월은 어떠했는지?
A. 구홍서 좌장. 수십년의 숫한 세월이 흘렀다.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자식을 낳고 자리 잡고 살게 되었는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구소련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족 독립 국가들이 세워지자 상용되던 러시아어도 쓸 수 없게 되었고 현지에 살던 고려인들은 국적도 없어져 버렸다. 한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거주국가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으면 모든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회교도의 민족주의 확산으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이제 한인은 여러 가지로 심한 차별을 극복하고자 다시 옛 땅 연해주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앙아시아로부터 재 이주해 오는 고려인 동포들로 연해주는 새롭게 고려인 사회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Q.김재덕 위원장. 그렇다면 사할린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A.구홍서 좌장. 2차 세계대전 끝날 당시 사할린에는 일제의 의해 강제동원당한 탄광노동자, 징용병 등 4만여 명의 한인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패망하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간의 협정에 의해 일본인은 전원 본국으로 귀국하였어도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곳 한인들은 무국적 상태로 오랜 세월 방치되어져 있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다. 이들은 일본에 의해 징용당해 갈 때는 일본의 황국신민이라 해놓고 전쟁에 패하자 일본 국민이 아니라며 철저하게 일본에 의해서 배신당하였으며, 더구나 독립된 조국에서도 버림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한국은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귀환노력을 외면한 채 30여 년 이상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에도 사할린 한인문제를 협상의제로 떠올리면 기본조약 체결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행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자국민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어떤 존재 가치가 있겠는가. 눈물을 젖시었다.
문경시에서 평화포럼을 맡은 구홍서 좌장은 "고려인은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자랑스런 동포다. 거주국의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가난과 질곡의 시간을 보내온 해외동포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한민족공동체 통합의 새로운 역사발전을 어떻게 기대한다는 말인가"라고 인터뷰를 마쳤다.
김재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