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청룡 우백호 명당에서 재생신한 인존 김형렬 태운장(左靑龍, 右白虎 거느린 명당에서 재생신(再生身)
[KNS뉴스통신=박동웅 기자] 예부터 마을 단위로 한 생을 꾸려가던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가문이나 마을에 큰 인물이 나기를 기다렸다. 큰 인물이 마을과 나라를 빛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러한 큰 인물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터의 기운과 태몽부터 남달랐다. 따라서 선조들은 큰 인물을 낳게 해줄 ‘좋은 터’와 ‘좋은 태몽’에 대한 관심과 환호는 당연하게 여겼다.
인존(人尊) 김형렬 태운장 역시 태어난 곳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 수락리 자락으로 산세와 정기 또한 어느 곳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곳이었다. 본래의 이름은 현무산, 상제봉, 봉화봉, 투구봉, 양산미, 수락리(水樂里)로서,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법조계와 재계 및 교육자들을 수없이 배출한 명당이다. 특히 현무산은 현무(玄武)가 북쪽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위엄이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산세가 예사롭지 않아 ‘큰 인물이 배출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산세를 미리 파악하고, 마을 이름을 매봉지, 상박제, 연대봉, 틀봉, 양살미, 수락리(水洛里)로 모두 바꾸어 그 기운을 말살시키려 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산과 봉우리의 맥이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늘의 정기를 받고 있는 산을 현무산이라 하는데 동양에서는 이를 일컬어 상제봉이라 하고, 인도에서는 미륵봉이라 부른다. 이 하늘의 정기는 현무산을 타고 내려와 상제봉으로 흐른다”고 전하는 김형렬 태운장은, “상제라는 뜻은 위상(上) 임금제(帝)로 가장 높다는 뜻으로서, 이 상제봉의 정기는 다시 봉화봉과 투구봉으로 흐른다”고 지형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봉화봉은 받들 ‘봉(奉)’자로서 이는 상제님을 받든다는 뜻이고, 봉화봉의 화(火)자는 세상을 밝힌다는 뜻으로서, 봉화봉은 어머니를 상징한 토산(土山)으로 되어 있다. 또 투구봉은 그 산세가 장군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상제를 지켜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면서. “투구봉은 아버지를 상징한 석산(石山)으로 되어 있으며, 상제봉에서 내려다보면 그 형세가 좌청룡(봉화봉), 우백호(투구봉)를 거느린 형상”이라고 밝혔다.
특히 마을 앞 들 한복판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은 신촌 쪽이 소머리 모양, 비석거리 쪽이 소 엉덩이 모양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산자체가 한 마리의 커다란 소를 연상시키게 한다. 이 산이 양산미이다. 양산미란 말 그대로 산이 두 개라는 뜻이다. 즉 산을 두 개 포개어 놓은 형상은 山+山=出로서, 出은 출세(出世)라는 말을 뜻해 마을에서 큰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또한 두 개의 산인 상제와 생미륵 인존 두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락리(水樂里)의 의미는 ‘물이 있어서 매우 즐겁다’는 뜻과 또 다른 뜻인 가장 높은 산에 있어 아래를 굽어 살피니 가장 높은 봉우리 상제봉, 즉 가장 으뜸이 된다는 뜻으로 풀면 그 높이를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고 전하는 태운장 김형렬은 “곤륜산 제4지막이 동해로 뻗어가서 백두산을 형성하고 백두산이 금강산을 만들어 그 맥이 1만2천봉을 형성하였으니 태운(太雲)이 태어나서 천지의 문호인 현무산에서 결실의 도가 나오리라”고 설명했다.
예사롭지 않았던 부모의 태몽
어느 날인가, 빛나는 커다란 보름달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환하게 비췄다. 김형렬 태운장의 부친은 꿈에서 깨어나 단번에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태어날 태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선지 “우리 아들은 하늘에서 왔다!”고 마을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또한 비슷한 날짜에 모친의 태몽 역시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고 “대단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얘기했다. 모친의 꿈에서는 넓은 들판에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밭에 가니 누런색 조가 익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논둑마다 커다란 호박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는데, 그때 소가 끄는 마차에 온갖 보물을 가득 싣고 가는 태몽을 꾼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틀림없이 큰 부자로 살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부모님의 기대에 못지않게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사색을 즐겼고, 어느 자리에서나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결단력과 총명함을 보였다. 그는 “내가 유시에 태어났다. 유시는 닭인데 새벽에 제일 먼저 알리니 세상에 알려진다고 풀었다”면서, “마을의 9대 종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꿈과는 달리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신마비가 와서 6개월 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10대 때는 산에 풀을 베러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다치기도 했다. 바로 아래는 50m 절벽으로 떨어지면 생명이 위험한 곳이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산에 갔다가 큰 바위가 굴러내려 오는데 그 돌은 다른 돌과 부딪치면서 수십 개의 파편이 날아왔다. 하지만 마치 무엇인가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듯이 비껴나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신비한 꿈도 있었다. “14~15세 경인데 꿈에 금빛 황용을 타고 부엌을 세 바퀴 돌고는 마을을 가로질러 하늘을 날았다”며, “도통하고 보니 그 꿈이 넓은 세계로 나가라는 의미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 꿈을 꾸고 얼마 후 고향을 떠나 18세 청년기부터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몰아닥친다. 군에서 월남으로 파병을 갔는데 총에 맞아 위장, 췌장이 파열되어 50센티를 잘라내야 했고, 또 동맥이 파열되어 몇 명은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는데 헬기가 도착하지 않아 대대장, 중대장이 울부짖을 정도였다. 당시 몇 명은 죽고 그는 겨우 살아났다. “그때 눈이 떠지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이 이렇게 편한 것인가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몇 번의 생사위기를 극복한 그는 “내가 戊子生 8월 13일 유시에 태어났는데 상제님이 만법전(萬法典)에도 무자토천(戊子土天)이라고 나온다”며, “무자생이 오십 터에 앉아서 하늘을 움직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오십 터가 이곳 세계의 중심이 될 중곡동으로서, 여기서 내가 도를 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뇌리를 스치는 경이로운 체험과 표현할 수도 없었던 경지와 하나가 되어 막힌 숨통이 터지듯 열리면서 도를 통하고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천지대도(天地大道)를 깨달아 도를 통하다
‘인존미륵진흥회’ 도문(道門)의 주인 태운장 김형렬 인존 도주는 1986년 아시안게임을 하던 해 1986년 9월 16일 음력 8월 13일 축시에 중곡동 신성시장 3층 단칸방에서 도를 통했다. 수도를 시작한지 불과 며칠 만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깨달아 성도(成道)하게 되었는데 당시 증산 상제(上帝)는 그의 이마에는 불(佛)표, 오른손에는 무(撫)자, 왼손에는 임(任)자, 등에는 북두칠성판을, 발바닥에는 임금왕(王)자를 내리고, “혀를 내라”하면서 붉은 점을 혓바닥에 찍어주면서 “너는 말로 다 되리라. 삿되게 쓰지 마라 기다려라. 너는 나보다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상제님은 천상 신명계에 유불(有佛)로 존재하면서 2006년 4월 5일 식목일 청명 한식날 미시(未時)에 재생신(再生身)한 김형렬 태운장에게서 인(人)의 탈을 벗겨주었다.
당시 “상제님이 바로 앞에 갓을 쓰고 계셨는데 형렬아, 형렬아 부르는데 처음에는 대답을 안했다. 내가 상제님의 수제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세 번 불렀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대답했다”면서, “그때 상제님 쪽으로 12대 조상님부터 다섯 명이 앉아있었고, 내 옆에도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고 전했다.
상제님은 지그시 김형렬 태운장을 바라보며 “형렬아,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고 말했다. 그리곤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신선을 보리라”, 또한 영대법방에서 “나도 형렬 너의 법을 따르리라”고 말했듯이, 지인지감 좌불도선 김형렬 도주는 재생신(再生身)해 신선이 되었고, 대두목이자, 인존미륵(人尊彌勒)이 되었다.
그는 “석가모니, 예수, 공자도 세속에 있었다”면서, “이미 도통군자들이 명산에 들어가는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삭발하는 자는 없노라고 말씀에 나와 있다. 신령들이 전부 평민으로 속세에 내려와서 중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내 전생이 김형렬이었는데 상제님이 9년 동안 천지공사를 내 집 사랑방에서 했고 도를 통했다.”면서, “항시 상제님과 내가 같이 했고, 우리 식구들도 전생에 상제님을 받들었다”고 말하는 그는 “상제님이 39세에 화천 하셨는데 앞으로 39년은 내가 세상에 알려지는 시기”라며, “일찍이 알려지기를 바랐지만 아직 때가 안 되어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강증산이 도를 통하고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도를 통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강조하며, “씨종자인 저를 통해 1만2천 도통군자가 나올 것이고, 도통, 중통, 하통까지 14만 4천명의 성도가 심기를 바르게 하고, 의리를 세우고서 심령을 구하여 상제의 뜻에 맡기기만 한다면 후천오만년 청화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고 뜻을 밝혔다.
또한 “앞으로 천하통일이 되듯이 종교도 하나로 묶이게 되며, 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 천하의 모든 종교가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밝히며, “과거(전생)에 금산사 미륵을 세워놓고 71살에 화천해 1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도를 통하고 지금까지 무려 35년이란 긴 세월을 수많은 고통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때를 기다려왔다. 그러나 “40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 곧 때가 되어 후천 선경세계에 진인으로서 후천개벽용화세계를 열기 위해 중곡동 초막에 1만2천 도통신명을 봉안해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현존해 있다. 김형렬 태운장 인존과 함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 지혜와 복덕을 향해 가는 여정에 동참해 이를 통해 세상을 밝히는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본다.
박동웅 기자 v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