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잇는 가교”
[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인천은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동북아시아의 허브공항으로 자리 잡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은 세계와 대한민국을 잇는 다리이다.
인천은 예로부터 반도와 대륙을 잇는 물류의 중심이자, 교류의 장이었다. 그 중심에는 1600여년 전 삼국시대부터 대외교류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온 ‘능허대(凌虛臺)’가 있었다.
그래서 ‘능허대’는 대륙을 향한 반도의 꿈이다.
‘능허대’는 연수구 청량산 끝자락의 서북쪽에서 뻗어 조그만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포구다. 과거 중국 사행(使行)길에 오르는 사신들이 배를 탔던 곳으로 ‘한나루’라고 일컬었다.
19세기에 쓰여진 ‘인천부읍지’에는, “능허대 아래에 있는 대진(大津)은 삼국정립 때 백제의 조천로(朝天路)이다. 고구려에 의해 길이 막히자 중국 가는 사신이 여기서 바다를 건너 중국 산동의 동래주(東萊州)에 닿았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허대’가 처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서기 372년 백제 근초고왕 27년이다. 당시 백제는 이곳을 통해 중국[東晉]과 통교한 이후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 전인 475년(개로왕 21)까지 100여 년간 중국과의 교류를 담당한 중심지였다.
이후 ‘능허대’는 제물포항이 개항되기 전까지 대중국 교류의 중심이었으며 인천을 세계적인 물류‧교류의 중심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 흔적은 인천 곳곳이 남아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득물도(得勿島, 현재의 덕적도)를 경유해 백제를 공격하며 백제 멸망의 서막을 열었고 용유도에 고려 사신이 머물렀다는 조천대(朝天臺)가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객관인 경원정이 영종도에 됐다.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한 명나라 초기와 여진족이 발흥한 후기에 중국으로의 사행은 육로 뿐 아니라 해로도 활발히 이용됐다.
또한, 문학산의 사모지고개(三呼峴, 이별을 아쉬워하여 따라온 가족들이 능허대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을 크게 세 번 외쳐 부름), 용유도의 기암(妓巖, 사신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녀의 이야기) 등 인천 곳곳에서 전해지는 중국 사행과 관련되는 전설들은 그 옛날 찬란했던 영광을 응변하고 있다.
한편, ‘능허대지(凌虛臺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돼 있다.
1950년대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유원지였던 능허대와 그 해변은 매립으로 개발돼어 옛날의 수려했던 풍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는 1988년 능허대 둘레에 연못을 조성하면서 그 위에 세워둔 조그만 정자만이 예전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최도범 기자 h21y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