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마다 역사적 교훈을 통해 극복해 왔다. 어려움 앞에 오히려 더 단결하는 민족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3‧1운동이다.
지금으로부터 99년 전,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만방에 알렸다.
3‧1운동은 우리민족, 국토가 일제의 총칼 앞에 유린당할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온 민족이 일제에 항거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1일을 기하여 서울을 비롯한 주요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이후,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전 민족이 참여한 최대의 항일 운동이었다.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항일 해방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신분과 계급을 넘어 우리 스스로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주정신과 독립을 위해 대한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고장 대전, 충남에서도 삼일운동 물결이 거셌는데 천안 목천면에서의 유관순열사의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지역 중 한곳이었으며 대전․충청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전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은 인동장터와 유성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을 들 수 있다. 3‧1운동 당시 1919년에 대전은 충청남도 대전군이었고 철도가 부설되어 발전하고 있는 신생도시였다.
대전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인동장터는 지금과 같이 대전역 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본정통이라고 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번화가였다.
그 당시 인동장터는 상시시장과 1일, 6일마다 열린 5일장으로 나무를 해다 팔던 나무꾼들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지배에 분노한 인동시장의 나무꾼들이 3월3일에 인동장터에서 일어나 만세를 외쳤고, 때마침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운동의 영향으로 지역의 유학자, 상인, 나무꾼 등이 주축이 되어 5일장이 열리는 3월16일에는 400여명이 참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동장터만세운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3월27일과 4월1일에도 계속시위를 하였다. 이 운동은 인근 원동지방까지 확산되었고, 유성장터 만세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전의 또 다른 5일장이 서는 유성장터에서도 인동장터와 함께 3월16일 2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였으며 보름 후 5일장인 3월31일에도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일제 경찰의 발포에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으나 일제 헌병들의 무력적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대전, 충남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힘과 저력이 개개인의 뼈속에 녹아 흘러 보훈정신으로 함양 되어야 할 것이다.
3월1일 아침에는 모든 가정에 태극기를 게양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과거에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순국선열께 감사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대전지방보훈청 황순창 주무관 dt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