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 복식(服飾), 다회와 망수를 아시나요?

[인터뷰] 다회·망수 장인 임금희씨…“다회장 아직 없어... 경합 통해 '장(인간문화재)' 지정해야"

2012-10-26     조해진 기자

[KNS뉴스통신=조해진 기자] ‘다회’와 ‘망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생소한 단어로 들리겠지만 ‘다회’란 여러 겹으로 합사한 명주실로 짠 끈(끈목)을 가리키는 말로 옛날 복식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우리의 전통문화다.

 다회는 한올한올 손수 짜야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과정이 복잡하지만 그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술’이다. 이 다회를 이용해 다양한 모양으로 짜낸 것을 ‘망수’라고 말한다.

‘다회’와 ‘망수’는 현재 대부분 사용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후수’ 등 궁중 의상에 사용되거나 선비들의 멋을 내는 도구이면서 양반 등의 계급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며 조선 복식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었다.

완성된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작품들이 모두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고 세밀하며 전체적인 모습을 봤을 때 나타나는 문양은 그 과정의 복잡함과 인고의 시간을 대변한다.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들어가는 정성과 고단함이 크고 현재 많은 곳에 이용되지 않는 까닭에 ‘다회’와 ‘망수’는 그 명맥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에 부딪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복잡하고 고단한 과정을 이겨내며 아름다운 ‘다회’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중 <KNS뉴스통신>은 지난 17일부터 23일까지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다회·망수 그 천년의 시간 속으로···')를 연 장인 임금희(51)씨를 만나 다회와 망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만난 임 장인은 단아한 작품 만큼이나 모습이 고왔다.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섬세한 장인의 풍모를 뽐냈다.

- 우리나라 전통 복식의 근본 ‘다회’

임 장인은 먼저 다회에 관련해 설명을 시작했다.

“다회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평직인 ‘광다회’와 끈목의 둘레가 둥근 ‘동다회’로 나뉜다. 현재에는 동다회가 종종 노리개 등 장신구로 사용되고 있지만 광다회는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유물 복원에만 사용되고 있다”

옛날과 달리 많이 쓰이지 않는 다회는 현재 고증을 통해 유물을 복원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망수의 경우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손지갑이나 가방 등으로 응용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임 장인은 현재 우리 유물을 고증을 통해 복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시회에서도 우리나라 궁중 의복과 장신구 등 유물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그 쓰임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히 인물들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두는 등 고증을 통한 유물 복원에 대한 노력이 엿보였다.

임 장인은 유물 복원을 우선시 하는 이유에 대해 “원본인 유물을 그대로 재현하고 난 뒤에 디자인을 해서 현재 생활에 맞춘 현대물품을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많은 질책을 받는다”고 말했다.

임 장인이 다회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준 광다회 명인 고 김주현 선생은 과거에 광다회를 이용해 태양, 광물, 고궁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김 선생의 작품을 보고 ‘이게 광다회냐 그림이냐’며 질책했고 곁에서 지켜봤던 임 장인은 뼈저리게 가슴이 아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다회와 인연을 맺게된 장인··· 고단했던 ‘다회’ 연구

그는 안타까운 스승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회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엔 지금은 돌아가신 김주현 스승님에게서 매듭을 배웠다. 매듭을 배울 때는 보통 나일론 끈으로 배우는데 미끄러워서 잘 풀어진다. 이 때 스승님께 매듭이 잘 풀어지지 않는 단단한 끈이 없겠냐고 물었더니 스승님이 ‘그게 바로 다회다. 복식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없어졌지만 다회는 우리의 근본이었다’라며 다회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처음 우리나라의 전통 매듭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던 임 장인은 김 선생의 권유로 다회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임 장인은 매듭과 망수의 명인 조수현 선생에게 동다회와 망수를 배웠고 김 선생에게는 각종 이론을 비롯해 광다회를 배웠다. 그러나 임 장인이 다회를 배우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광다회를 미처 다 전수받기도 전에 스승인 김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사실 김주현 스승님께서 많은 양을 습득시켜주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면서 “다회를 가르쳐주시던 스승님이 돌아가시니 마치 ‘끈 떨어진 갓’과 같은 모양새였다.

한 달 동안을 우왕좌왕하며 ‘다회를 어찌해야하나. 이제 다시 갓 피어나고 있는 다회를 어떡하나’라는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후 임 장인은 혼자서 연구를 계속했다.

“과거 김주현 스승님의 작품이 질책을 받을 때 나도 뼈저리게 아팠다. 질책을 받던 선생님을 보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연구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증 자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고 털어놓은 임 장인은 스승과의 사별 이후에도 다회와의 인연을 놓지 않고 연구하며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물 복원을 위해 임 장인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유물 복원을 위해서는 고증 자료가 필요했다. 임 장인은 “고궁 박물관 등을 방문해 유물을 살펴보고자 했지만 돈을 내고 보겠다고 해도 쉽게 열람을 시켜주지 않았다. 실제 유물을 살펴보지 못하니 공부를 하면서도 벽에 부딪혔다”며 이론적인 공부에서 한계에 부딪혔음을 시사했다.

다행히 임 장인의 노력을 알아준 몇몇 교수들이 우리나라 유물 복원을 임 장인에게 맡기면서 고증 자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내가 연구한 결과가 유물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는 ‘내 연구가 헛되이 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고 말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회를 제작하는 것이 고된 작업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다회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특히 광다회를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광다회는 다른 것들보다 추가 더 많아 한 번 실이 엉켜지면 내가 원하는 직조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잘못된 부분이 바로 보이지 않고 완성이 되어야 보인다. 특히 상하교차조라는 것은 추가 200개씩 달려있는데 이것은 한 번 틀리면 다시 풀어 수정할 수가 없다. 완성했는데 틀린 부분이 보이면 결국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고된 과정에 정말 많이 울었다”

- 건강 적신호··· 고비를 넘기게 해준 스승님의 한 마디

다회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임 장인의 건강에 적신호도 들어왔다. 다회가 재미있어 오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다회에 매달렸지만 어깨에 무리가 오더니 완전히 손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됐었던 것. 한의원에 가 진료를 받았더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물건도 못 들 것”이라며 한의사에게 경고도 들었다.

임 장인은 “몸이 다 망가지겠다는 걱정이 들면서 다회를 계속해야하는 지에 대해 고민이 들 때였다. 동다회를 가르쳐주신 조수현 스승님이 대회 출품을 위해 만든 작품을 보시곤 ‘아효, 뼈빠지는 작업했구나. 그런데 누가 알아주냐. 이거는 대통령상 감이다. 근데 보는 안목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제 작품을 평가해주신 것을 듣고 다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며 스승님의 인정을 받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밝혔다. 조 선생에게 인정을 받았던 그 작품은 대회에서 입선을 했다.


- ‘다회’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임 장인은 다회를 배우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끈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센터에서 강좌를 하면 보통 3개월 치의 수강료를 미리 받는데 대부분의 수강생이 그 돈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처음 매듭부터 시작해서 다회를 배우는 초반까지는 무척 재미가 있다. 아직 다회를 문화재로 뽑지는 않기 때문에 희소성 때문에 배워서 인간문화재가 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추가 16개로 올라가게 되면서부터 다회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때문에 제자를 뽑을 때는 욕심을 내거나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다회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회와 망수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이 보이면 내가 먼저 권한다”

스승님을 예기치 않게 잃은 뒤 다회 연구에 고된 과정을 겪었던 임 장인은 다회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다회를 연구하면서 하나하나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이건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고 이렇게 하면 안되지만 이렇게 하면 되더라. 이렇게 상세히 노트에 남겨뒀다. 혹시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제자들에게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항상 얘기하고 있다.

어려운 과정에서 주저앉는다면 다회를 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줄어들지 않겠나. 일각에서는 ‘귀한 것은 귀하게 풀어야지 너무 쉽게 푸는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승님께 배운 것과 내가 연구한 것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다. 문제는 배우던 제자들이 어렵다고 나오지 않을까봐 그 부분이 가장 걱정된다”

우리 전통문화인 다회를 사랑하며 그 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임 장인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보였다.


- ‘다회’의 유지·발전을 위해 정부에게 바라는 점

임 장인은 이 다회를 보존하고 더 많은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정부에게 바라는 지원 등 여러 가지 방안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관광하는 코스에 다회와 망수, 매듭을 보고 갈 수 있는 상설전시장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또한 전시장에서 다회가 보여지고 작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다회장’을 선발하는 것이다.”

그는 상설전시관과 더불어 ‘다회장’을 복구시켜 정부의 공식적인 인증을 통해 명맥을 유지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임 장인의 설명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현재 매듭분야는 인간문화재 2명, 지방문화재 1명이 지정돼있다. 그러나 다회는 1명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에는 경국대전 경공장 조에 다회장이라고 종목이 있었다. 당시 다회장이 훨씬 더 수가 많았지만 지금은 역으로 매듭장이 더 많은 상태다. 끈목이 있어야 매듭이 있는 것인데 매듭만 이어지고 있으니 ‘사상누각’인 상황이다.”

매듭의 기본이 되는 끈이 이어지지 않고서는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울러 그는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를 지정하는 부분에 대한 오류도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중요무형문화재의 기득권, 계보 등이 강해 인위적으로 라인을 서려고 한다. 또한 반드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기를 통해서만 만들어야 전통적이라며 인정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 집기는 나무로 만들어져 남아있는 것이 없다. 집기의 중요성 보다는 모두가 경합을 해서 ‘정말로 그 시대의 유물을 똑같이 복원할 수 있는가’를 평가해 ‘장’을 지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전통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유물을 당시와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실력에 따라 인간문화재 등으로 지정해야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임 장인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다회가 인정받고 있는 점을 이야기하며 외국인들과 다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국민들을 위해 다회의 작업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장의 필요성도 얘기했다.

그는 “요즘은 노래 등을 포함해 ‘한류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는 하고 있지 않지만 2002년도까지는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이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오히려 외국에서의 반응이 더 좋다. 다른 나라들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섬세한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항상 한국 제품이 최고로 여겨진다”며 우리나라 다회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이어 “임금 왕가에서 사용되는 어떤 물품들을 만드는 곳을 경공장이라고 한다"면서 "다회, 망수, 매듭 등이 작업대에서 만들어지고, 문양이 나오는 과정을 외국인들이 본다면 우리 문화를 더욱 빛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임 장인은 또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고 얼레를 돌리고 천연재료로 염색을 하고 다회와 망수를 짜는 모습 등을 상세하게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작업하는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임 장인이 처음 다회를 배우면서 업고 있던 첫째 딸는 벌써 25살이 됐다. 남편도 임 장인의 뒷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주었다. 임 장인은 고된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을 인정해준 가족과 스승님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 전통문화인 다회를 지키기 위해 임 장인은 묵묵히 고된 세월을 견뎌냈다. 임 장인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다회는 그 마음 만큼이나 단단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웠다.

임금희 다회 ·망수 연구소 T) 02. 447. 2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