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된 전통을 복원한 '황칠공예'

2011-03-01     한일문화예술신문

“일본이 금칠이면 한국은 황칠”

세계 각국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더욱이 단절되었던 전통을 현대에 잇고, 복원된 전통을 후손들에게 전달해 주려 노력하는 장인들의 노력은 고경(苦境)을 이긴 사명감의 산물이다. 지난 200여년간 전통공예의 단절을 이겨내고 새롭게 자리매김하며 각광받고 있는 한국의 전통공예문화 “황칠”에 대해 한일문화경제신문 COPAN에서는 그 의미와 역사성을 취재해 보았다. 

'황칠'은 목재, 금속, 종이, 피혁, 유리, 대리석, 나전, 도자기 등 거의 모든 분야와 소재에 접목이 가능한 공예로서 옻칠 또는 일본의 금칠과는 다소 그 성격을 달리하며 실생활에 적용이 가능한 것으로 ‘옻칠이 천년이면 황칠은 만년이다’라는 통설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금칠공예를 최고로 인정하며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황칠이 최고의 공예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황칠은 피를 잘 흐르게 하는 활혈제이고 특히 노화방지와 당뇨병, 술을 많이 마셔 간이 안좋은 사람,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아토피, 뼈 성분의 골밀도가 떨어지는 골다공증, 전립선염, 중풍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황칠의 역사는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645년)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문헌은 전하고 있으며, 해상왕 장보고가 교역품으로 취급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공 품목으로 강대국에 넘겨져 정작 한국 선조들은 제대로 써보지 못한 순탄치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여년간 단절되었던 황칠의 복원은 1985년 구영국 명인이 김제 금산사에 잠시 들렸을 때, 노 스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불교미술에 숨죽이며 존재를 감추어왔던 황칠을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전통공예로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영국 명인은  당시 노 스님께서 약간의 황칠을 주시며 ‘이것을 가지고 평생의 화두로 삼으라. 함부로 하지 말고 세상 밖으로 자신이 있을 때까지 비밀리에 연구하거라’ 이렇게 말씀하시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며 척박하고 외로웠던 그간의 심경을 토로했다. 또한 “지금이야 자료도 발견되고 유물도 발견되었지만 당시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며 “복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의 바다였다.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존재인가?  이것하나 복원 못하는 못난 후손인가라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구영국 명인은 “지구상에서 1속1종의 황칠나무는 한국 밖에 없다. 향후 세계는 우리의 황칠을 주목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황칠을 지정할 것으로 본다. 차이나(중국)는 도자기, 저팬(일본)은 칠의 나라의 뜻인데,  개인적 소견으로 우리나라는 ‘황칠의 나라’였으면 좋겠다”며 황칠공예의 올바른 평가와 가치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기를 희망했다. 현재 서울산업대학교 황칠공예 겸임교수인 구영국 명인이 복원하여 완성한 작품은 대한민국 청와대와 육군박물관, 하토야마 일본총리 등 몇몇 안 되는 귀인들이 소장하고 있으며, TV 드라마 “궁”과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선보였으며, 앞으로 대중화 및 일반적 보급을 위한 노력도 할 것임을 밝혔다.